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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서 남주자

당시 삼백수(17.11.01)

by 김길우(혁) 2020. 11. 1.

제인병원 병원장 김길우(02, 3408~2132)

김길우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213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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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 당시 삼백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당시삼백수}는 청조 건륭제 때 활약한 손수孫洙가 직접 편찬한 당시선집唐詩選集이다. 당시 손수는 53세였다. 굳이 책의 제목에 ‘삼백수’를 단 것은 {시경詩經}을 흉내 낸 것이다. 원래 시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생전에 많은 문집을 남겼다. {형당만록蘅塘漫錄}, {형당존고蘅塘存稿}, {이문록異聞錄} 등이 그것이다. 그의 조적祖籍은 안휘성 휴녕休寧이다. 출생지는 인접한 강소성 무석無锡이다. 자는 임서臨西, 호는 형당퇴사蘅塘退士이다. ‘호’를 통해 은거를 즐긴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건륭 16년인 1761년에 진사가 되었다. 건륭 28년인 1763년에 부인 서난영徐蘭英과 함께 {당시삼백수}를 편찬했다. 그는 이 책을 편찬할 때 심덕잠沈德潛의 {당시별재唐詩別裁} 및 왕사정王士禎의 {고시선古詩選}을 참고해 310수를 정선했다. 편찬 의도는 그가 쓴 {당시삼백수} 서문의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삼백 수를 숙독하면 시를 읊지 못하는 사람도 시를 읊을 수 있게 된다.”
이는 ‘당시 3백수만 외우면 절로 시를 읊고 지을 수 있다.’는 속담을 그대로 인용해 서명書名으로 삼은 것이다. 21세기 현재까지 {당시삼백수}는 무수히 많은 역대 당시선집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애초부터 학동의 학습을 목적으로 편찬된 데다가 수록된 시 역시 내용이 쉽고 교육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듯싶다. 
원래 {당시삼백수} 이전에도 널리 읽힌 뛰어난 선집들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인 선집으로 명나라 때 나온 {당시선唐詩選}을 들 수 있다. 한때 명대 말기에 고문사파古文辭派를 이끈 이반룡李攀龍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에는 총 128명의 465수가 수록돼 있다. 지금은 성당盛唐 때의 시를 이상적인 시의 세계로 간주한 이반룡 일파의 시론을 구체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당 때의 시가 많고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때의 작품이 적은 이유다. 이백 및 두보와 함께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일컬어지는 한유의 시를 1수만 싣고, 백거이의 시는 아예 싣지 않았다. 성당 때의 작품 흐름과 어긋난다는 게 이유였다. 역대 왕조의 시가를 편제한 그의 {고금시산古今诗删} 역시 송나라와 원나라 때 작품은 단 하나도 싣지 않았다. {당시선}의 선정취지와 마찬가지로 진한秦漢시대 때 나온 악부樂府 등 고문사古文辭의 취지와 부합치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당시삼백수}에 밀린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 편협하다는 비난을 받은 결과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일본 제왕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에도 초기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는 이반룡의 ‘고문사파’ 이론을 차용해 이른바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를 창시하면서 {당시선}을 극도로 존중했다. 고문사학파는 공자시대의 관점에서 {논어} 등의 경전을 해석하자는 입장으로 송대의 성리학을 치지도외置之度外한 게 특징이다. 이반룡이 {고금시산}에서 송대의 시를 단 한 수도 게재하지 않은 것과 취지를 같이한다.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당시선}이 {당시삼백수}보다 널리 읽히는 것도 ‘일본 제왕학’을 정리한 오규소라이의 이런 행보와 무관치 않다. 
중국에서는 청대에 들어와 손수의 {당시삼백수}가 나오면서 {당시선}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반룡을 추종하는 고문사파가 비주류로 몰린 게 결정적인 배경이다. 손수가 {당시삼백수}에서 당나라의 전 시기의 작품을 두루 반영한 것도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당시선}이 퇴장한 상황에서 {당시삼백수}는 손쉽게 낙양의 지가를 올릴 수 있었다. 일본과 달리 중국에서 21세기 현재까지 {당시삼백수}가 당시 선집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이유다. 
{당시삼백수}에는 당나라 시인 77명의 시 총 320수가 수록돼 있다. 목차는 시체詩體에 따라 오언고시五言古詩, 칠언고시七言古詩,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로 구분돼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를 청나라 강희 45년인 1706년에 편찬된 {전당시全唐詩}의 48,900여 수와 비교하면 160분의 1정도이다. 작자들은 무명씨를 포함해 77명으로 {전당시}의 2200여 명에 비하면 30분의 1가량이다. 제왕, 사대부, 승려, 가녀, 무명씨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제목만으로 계산하면 294편, 낱개의 시로 계산하면 320수가 된다.
수록된 시의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작품성보다는 각 분야의 대표작으로 여겨진 시들을 시체詩體 별로 총 3백여 수를 선정한 결과다. 애초부터 서당의 학습 교재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손수는 {당시삼백수}를 편제하면서 평점評點과 간단한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 손수의 원주原註는 나름 의미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 인명과 지명, 시어의 전고典故와 관련한 전적典籍 등을 인용해 놓은데 그치고 있어 완벽한 주석으로 볼 수 없다. 뛰어난 선집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삼백수}에 대한 보다 상세한 주석과 시 자체에 대한 해설의 필요성이 대두된 이유다. 청조 도광道光 14년인 1834년에 장섭章燮이 손수의 {당시삼백수}에 보다 상세한 주석을 덧붙인 {당시삼백수주소唐詩三百首註疏}를 간행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장섭의 {당시삼백수주소}는 전고典故와 명물名物에 대한 주석은 물론 장구章句의 대의大義와 작법作法 뿐만 아니라 작자의 소전小傳까지 덧붙인 매우 상세한 주석서에 해당한다. 특히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해 각각 청나라의 저명한 주석가인 왕기王琦와 구조오仇兆鰲의 주석을 인용해 설명하는 등 전인들의 성과를 두루 반영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주소본이 세상에 가장 널리 유포된 {당시삼백수} 판본이 된 배경이다. 이후에도 {당시삼백수}에 관한 주석서들이 많이 간행됐지만 모두 장섭의 {당시삼백수주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른바 ‘주소본’이다.
주목할 것은 장섭이 ‘주소본’ 주석서 펴내면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선정한 시 10수를 끼워 넣은 점이다. 이로 인해 수록한 작자의 수에 변함이 없고, 손수의 평점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라도 수록한 작품의 수가 320수로 늘어나고, 손수의 원주가 누락되는 등 원래의 {당시삼백수}와 다소 차이를 보이게 됐다. 
당시 이를 불편하게 여긴 인물이 있었다. 사등음사주인四藤吟社主人으로도 불린 상원여사上元女史 진완준陳婉俊이 당사자이다. 그녀는 청조 광서光緖 11년인 1885년 손수의 원본을 저본으로 삼아 매우 상세한 내용의 {당시삼백수보주唐詩三百首補註} 주석서를 펴냈다. 이른바 ‘보주본’이다. 손수의 원주를 크게 보완했을 뿐만 아니라 시의 구조와 작법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고 체계적인 비주批註를 달아 놓았다. ‘주소본’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주석서로 평가받고 있다. 21세기 현재 일부 학자는 진완준의 이런 입장을 좇고 있다. 손수가 편제한 원래의 310수만 인정하는 주석서가 시중에 적잖이 나도는 이유다. 대표적인 저서로 서울대 중문과 교수 류종목 등이 번역한 {당시삼백수}(소명출판, 2010)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역자의 생각은 이와 약간 다르다. 장섭이 덧붙인 시는 모두 손수가 선정한 77인 작자의 작품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작자의 작시作詩 의도를 보다 명확히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손수가 선정한 310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역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주석가들이 제법 많다. 대표적인 저서로 서울대 중문과 명예교수 장기근과 진기환이 ‘주소본’을 저본으로 삼아 공역한 {당시삼백수}{명문당, 2014)를 들 수 있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당시삼백수}는 장섭의 ‘주소본’ 또는 진완준의 ‘보주본’을 저본으로 삼은 두 가지 판본의 주석서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본서는 ‘주소본’을 저본으로 삼기는 했으나 ‘보주본’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해당 시마다 진완준의 주석을 최대한 반영키 위해 노력했다. 해당 시의 주석 역시 기왕에 나온 여러 주석서를 두루 참고해 가장 적절한 것을 택했다. 시의에 부합치 않는 불필요한 주석은 과감히 생략하고 상세한 주석이 필요한 대목은 {사기} 등의 사서 등을 참조해 독자적으로 채워 넣었다. 번역은 우리말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면서 원래의 당시가 지니고 있는 맛을 그대로 보존키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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