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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서 남주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12.10.30)

by 김길우(혁) 2020. 10. 30.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제인병원 병원장 김길우(02, 3408~2132)

김길우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213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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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키워드; 분류, 양생, 용법

선조는 허준에게 어서 편찬을 명하면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서문」). 첫째, “근래에 중국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라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하라는 것, 즉, 기존의 의서들이 너무 잡다하니 잘 간추리고 분류하여 일목요연한 체계를 잡으라는 뜻이다. 둘째,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단순히 질병과 처방을 다루는 임상서가 아니라 섭생과 수양을 우선으로 하는 양생서를 쓰라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당시는 전란과 역병의 시대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의술은 극히 희박했다. 최선의 방법은 이 땅에서 나는 약재들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이 약재들의 명칭과 용법을 널리 보급하여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게 하라는 것이 선조의 당부였다. 요컨대, 기존의 의학적 전통을 집대성하고 양생술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조선의 백성들이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 허준은 선조가 당부한 이 세 개의 키워드를 훌륭하게 구현해 냈다. 먼저, 『동의보감』에는 의학사의 양대지존인 『황제내경』皇帝內徑과 『상한론』傷寒論, 손진인의 『천금방』千金方을 거쳐 이천의 『의학입문』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의학사의 최고봉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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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은 말한다. “유부의 의술은 가느다란 관을 통해서 하늘을 보고 좁은 틈으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몸속의 병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굳이 천리 먼곳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아도 병을 진단할 수 있다.” 동양의학이 해부학과 결별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즉, 한의학에서의 몸은 가르고 절개한다고 해서 보이는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다. 정·기·신의 접속과 변이, 경락의 배치 등을 파악하려면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몸이어야지 죽은 시체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이 점은 서양의학사에서도 제기된 바가 있다. 16세기의 의학자 파라셀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는 “시체를 해부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 해부학은 진정한 자연과 자연의 본질, 특정, 존재, 힘을 보여 주지 못한다. …… 참된 해부학은 …… 살아 있는 인체이다.”라고 주장했다.(로버트 아들러, 『의학사의 터닝포인트 24』, 조윤정 옮김, 아침이슬, 2007, 76쪽에서 재인용). 편작의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한의학에선 질병의 원인을 정기신의 균형이 무너진 데서 찾는다. 따라서 치유는 수술을 통해 특정부위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기를 되살려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해부학 자체가 의학의 진보를 말해 주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해부학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몸을 보는 방식이다.

고대 중국에서 해부의 무시는 시각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비범한 신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의 의자들은 그리스의 해부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세밀하게 관찰했다. 다만 그들은 다소 다르게 보았을 뿐이다. (시게히사 구라야마, 「의학과 인간을 보는 새로운 눈: 고전 중국의학에서의 시각적 인식」. 김시천 옮김, 『인문의학』 1집, 휴머니스트, 2008, 211쪽)

마지막으로 예진아씨와의 러브스토리? 택도 없는 소리다. 사랑이 이토록 특화된 건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연애라는 단어도 없었거니와 남녀간의 짝짓기는 생활과 하나로 묶여 있어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남녀가 나이가 들면 결연을 맺는 건 그야말로 자연스런 과정이지 그렇게 잔뜩! 힘을 주고 쟁취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대신 우정과 의리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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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편작조차도 치료할 수 없는 병 6가지

사마천의 『사기』『편작·창공 열전』에는, 편작이 정(鄭)나라 사람으로 성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며, 춘추전국시대 초기인 기원전 655년 활동을 시작하여, 300년 가까이 의술을 펼친 것으로 나와 있다. 명의의 대명사인 편작은 맥진(脈診)과 침술에 능했는데, 특히 “한방에서 맥진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편작의 후예다”라고 할 만큼 이에 정통하여 맥진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동의보감』에는 명의 편작조차도 치료할 수 없는 병 6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편작이 병에는 6가지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이치에 따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경우다.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재물을 중시하는 것이 두 번째 경우다. 먹고 입는 것을 챙기지 않는 것이 치료할 수 없는 세 번째 경우이며, 음양(陰陽)과 장기(臟器)가 다 안정되지 않는 것이 네 번째 경우다. 몸이 마르고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며,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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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인정물태’라는 것이 생로병사를 떠날 수 없고, 그렇다면 특히 병이나 죽음과 관련한 서사가 많은 것은 당연한 노릇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의서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포함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의학은 엄밀하게 정돈된 임상적 데이터만을 다루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편견 때문일 터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고정관념은 임상의학이 지닌 담론적 ‘차가움’을 반영한다. 의학은 엄격하고 체계적이어야 하며 민간의 ‘뜬’소문들을 담아서는 안 된다는. 그러고 보면 현대는 모든 사람들이게 지식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평등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제도적 차원에 한정될 뿐, 막상 담론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차원에 들어가면 지성과 통속 사이를 날카롭게 구획하고 있다. 따라서 병원과 약국이 사방에 널려 있지만 의학에 대하여 환자들이 느끼는 권위는 여전히 두텁다. 그것은 무엇보다 담론의 장벽 때문이다. 병원에는 서사가 없고, 약국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의학은 재미없고 지루하고 다만 무서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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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_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p. 392~395)


하지만 보다시피, 우리시대에 있어 임신과 출산, 그리고 탄생의 전 과정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철저히 병원에서 관리해야 하는 질병의 일종이 되었다.

먼저, 제왕절개는 산모가 위험하거나 아기가 위험할 때 쓰는 방법이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산모들이 제왕절개를 당연한 코스로 여긴다. 특히 병원들의 시설이 좋아지면서 기계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져만 가는 실정이다. 사람에 따라 분만통이 여러 날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목숨이 위태로운 건 아니다. 오히려 통증을 충분히 겪은 뒤에 분만을 하고 나면, 몸 전체가 환골탈태하는 해방감과 우주적 활동에 참여했다는 자존감을 만끽할 수 있다. 즉, 분만의 통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통은 그 나름의 리듬과 속도를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절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통과 함께하고 진통이 우리를 휩쓸어 버리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크리스티안 노스럽.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348쪽) 여성이 위대한 건 바로 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데에도 있다. 즉, 분만의 고통이야말로 여성의 우주적 특권인 셈이다. 그런데 이걸 의료기술을 통해 깔끔하게 해결해 버리면 이 특권은 아무런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용기와 담대함을 발휘할 기회 자체를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즉, 제왕절개는 단순히 통증을 완화시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내적 생명력을 완전히 침묵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신과 출산이 모두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어 버린다. 분만통을 겪지 않는 대신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살게 된다는 뜻이다. ‘출산후 우울증’이라는 것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다. 한마디로 자연적인 통증은 진통제와 마취로 해결하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만성적인 통증은 대책없이 감내해야 하는 전도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제왕절개뿐 아니라 기타 다른 병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조기검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 등 각종 치료에 부수되는 통증들 - 진액을 고갈시키는 - 은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 항생제만 해도 그렇다. 항생제가 투여되면 장내세균들을 다 죽여버리기 때문에 속이 메슥거리고 입맛이 떨어진다. 이것도 상당한 고통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통증들은 어떻게든 피해 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 봤자 통증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양상만 달라질 뿐. 출산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항이 또 하나 있다. 아기 또한 탄생의 주역이라는 사실이다. 아기는 그냥 무력하고 나약하게 있다가 엄마의 힘에 의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만과정의 능동적인 참가자이다. 모든 아기는 어머니의 임신, 진통, 분만에 나름대로 기여한다.”(크리스티안 노스럽, 같은 책, 352쪽) 생각해 보라. 진통이 시작되면 양수가 터지고, 그때 아기는 좁은 산도를 빠져나오기 위해 죽기살기로 몸부림친다. 불쌍하다고? 그렇지 않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오는 문턱을 자기 힘으로 넘는다는 건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죽음도 어쩌면 이런 과정일 수 있다. 그래야 또 후천의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현대의학은 아기는 완전히 ‘몰주체적인’ 대상으로 단정한다. 그저 백지상태로 있다가 부모에 의해, 의사에 의해 세상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상태라면 아마 태아 때 생명줄을 놓아 버렸을 것이다. 사실 아기의 생명력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맹렬하게 활동을 개시한다. 입덧이 결정적인 증거다. 어찌 보면 자기가 살겠다고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짓거리 아닌가. 임신당뇨 같은 병증도 아이가 당을 취하기 위한 ‘배후조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최근 현대의학에서도 탄생에 있어 태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의학담론이 등장했다. 양자의학이 바로 그것이다.

양자의학에서는 생명의 시작은 제 1조건인 엄마의 난자, 제 2조건인 아버지의 정자, 그리고 제 3조건인 죽은 사람의 “정신적 존재”인 영혼이 서로 합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의학에서는 생명의 시작을 삼합이라고 하며, 생명의 시작은 수정의 순간으로부터 계산한다. 이렇게 시작한 인간의 생명체는 만 38주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성숙을 하고 드디어 태어난다. …… 따라서 인간의 탄생은 세포적으로는 부모의 분신이지만 정신적으로 보면 진화의 모든 재능이 축적된 것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강길전 [충남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 「발생, 생명 그리고 인간」)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칼만과 닐 칼만 부부는 출산 경험이 있는 100명의 여성과 인터뷰한 결과, 수정하기 전의 영적인 존재는 지구상의 많은 문화권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칼만 부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출생 전 영적인 존재가 미래의 부모를 결정한다고 하였으며 그들은 출생 전 영적 존재를 “spirit-child"라고 불렀다. 따라서 비록 태아가 육체적으로 미성숙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산모와의 통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둘째, 태아가 이러한 영적 존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태아는 엄마의 감정을 느낄 줄 알고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셋째, 태아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출생 후 자궁 생활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용어나 개념은 다르지만, 동양사상에선 매우 익숙한 담론이다. 의역학적으로 보면 생명이란 정기신의 배합이다.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활동이 긴밀하게 결합을 해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이 시작된다. “천지의 정기가 만물의 형으로 되는데, ‘아버지의 정기가 혼이 되고 어머니의 정기가 백이 된다’ ‘아홉 달째에 신이 펼쳐지고 기가 충만해져 태가 완성된다’고 하고, 또한 ‘열 달 째에 태를 품는다’고 하니, 천지의 덕이 기와 합쳐진 다음에야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내경편」, ‘신형’, 12쪽)이다. 죽은 다음에는 이것이 혼과 백으로 흩어졌다가 어떤 조건 하에서 ‘헤쳐모여’를 하다 보면 다시금 생명 탄생의 서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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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_오장육부. 그 마법의 사중주 (p.236~237)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의 일상은 저주받은 리듬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말이 사라진다. 도시의 불빛이 어둠을 삼켜 화려한 불야성을 연출하고 그 불꽃을 쫓아다니느라 사람들은 새벽까지 부산스럽다. 그러곤 동이 터오를 때 잠들기 시작한다. 오행적으로 보면 모든 기운이 응축해야 할 시점에 깨어서 움직이고 기운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늘어져 자는 셈이다. 밤낮을 바꾸면 에너지는 두 배, 세 배로 소모된다. 태양의 에너지를 하나도 쓰지 못하고 내 안에 있는 기운을 쥐어짜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밤에 활동하는 경우, 그 내용이 결코 생기발랄한 것일 수가 없다. 형식이 내용도 규정하는 법, 점점 더 삶이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중독되거나 우울해지거나. 최소한 하루의 리듬에 대한 공통감각만 있어도 그런 식의 악순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복습 삼아 좀 다른 방식으로 익혀 보자. 시간은 공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즉, 시간이 공간이고 공간이 곧 시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중첩되어 있다. 예컨대, ‘지금’과 ‘여기’는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지금, 여기’들이 무수히 이어져 우주적 시공간이 된다. 본디 시공간엔 이름도 주인도 없다. 다만 ‘생성소멸’하는 흐름만이 있을 뿐. 그 변화의 국면에 차서(질서와 순서)를 부여한 것이 달력이다.

한해의 시작은 설날이 아니라 입춘(양력 2월 4일경)부터다. 태양력과 태음력을 합친 절기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입춘이 되어도 여전히 춥다. 하지만 하늘에선 서서히 바람이 용틀임을 하고, 그에 부응하여 깊은 땅속에선 씨앗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도 한해에 대한 각종 비전들로 설레인다. 청춘남녀의 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몸 안에선 간(담)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한다. 곧 나무(목)가 흙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봄의 시공간성이다. 여름은 불의 시절이다.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불이 사방으로 흩어지듯 사람들의 마음 또한 불꽃처럼 허공을 향해 질주한다. 그 더위의 절정에서 문득 입추(양력 8월 7일경)가 된다. 가을은 심판과 결실의 계절이다. 여름날, 그 무성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땅에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므로. 이걸 주도하는 것이 폐기운이다. 그리고 겨울. 천지가 닫히면서 씨앗들은 무서운 속도로 응축한다. 생명의 심연에 대한 대성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장의 수기운이 이 성찰을 주도한다. 이것이 우리의 시공간이 연출하는 1년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항상적이되 동일하진 않다. 이미 언급했듯이, 지구는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같은 기후를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가 순환을 낳고 그 순환이 곧 생성의 원동력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한해는 결코 짧지 않다. 사계절이 오고가는 동안 천지는 낳고 기르고 거두고 수렴하는 모든 과정을 다 해낸다.

하지만 현란한 스펙터클과 디지털 문명에 포위된 탓일까. 인간은 이 차이와 생성의 향연에 참여하는 법을 망각해 버렸다. 한마디로 ‘스텝이 꼬인’ 것이다. 봄이 오면 발심을 하지만 그것이 저 생명의 밑바닥에서 올라오질 못한다. 그래서 대체로 허황하다. 이 뿌리 없는 목표들을 우리는 종종 ‘희망’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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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다들 ‘난쟁이’들이 되어 버렸을까? 우울증에 자살충동에 극도의 의기소침까지.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도대체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 이게 10대, 20대들의 공통된 독백이다. 이름하여, 3대 무지의 법칙! 아주 이른 시기부터 거쳐야 했던 속도경쟁 속에서 내면의 지혜와 힘을 박탈당한 탓이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정·기·신’을 너무 빨리 소진해 버린 탓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정기신이 충분히 발현되려면 일단 출생에서부터 느린 것이 좋다. “사람이 처음 기를 받을 때 9일째에 음양이 확실히 정해지고 49일이 지나서야 태를 이루기 시작하며 그 뒤로는 7일에 한 번씩 변화한다. 그러므로 306일에서 296일을 채운 아이는 모두 상급의 그릇이 되고, 286일에서 266을 채운 아이는 모두 중급의 그릇이 되며, 256일에서 246일을 채운 아이는 하급의 그릇이 된다.”(『내경편』, ‘신형’, 12쪽) 그래서 전설이나 민담에 나오는 영웅들은 15개월, 심지어 20개월 만에 나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팔삭동이에 대한 차별상도 원천은 여기에 있었다. 자라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 3세에서 10세까지의 소아는 그 성품이나 기질을 보면 수명을 알 수 있다.

● 어릴 때 식견과 지혜가 뛰어나면 대부분 요절한다.

● 남의 의도를 미리 알아 빨리 대응하는 아이도 요절한다.

● 일찍 앉거나 일찍 걷거나, 치아가 일찍 나거나, 말을 일찍 하는 것은 모두 성품이 나쁘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잡병편』, ‘소아’, 1842쪽)

『동의보감』 ‘소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컨대, 빨리 뭔가를 터득하는 것은 성품이나 기질, 수명 등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 반대로, 이런 경우는 오래 산다. “아이의 골격이 완전하고 위엄이 있으며, 천천히 움직이고 마음을 써서 다듬어야 될 것 같은 아이는 오래 산다./ 갓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계속 이어지면 오래 산다./ 인중이 깊고 길면 오래 산다.” 아, 한 가지 더. “넓적다리 사이에 살이 없으면 죽는다.” 허벅지 살이 있어야 몸 전체의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대목은 좀 신경이 쓰인다. 요즘 연예인들을 보면 허벅지와 종아리가 거의 똑같은 사이즈인, 한마디로 새처럼 가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이게 청소년들의 미적 기준이 되면 정말 곤란하다. 아무튼 다시 속도의 문제로 돌아오면, 『동의보감』에선 아이의 동작이 완만한 듯 크면서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져야 좋다고 보았다.

우리시대와 완전히 반대되는 관점이다. 시대가 바뀌지 않았느냐고? 물론이다. 헌데, 시대가 달라졌다고 생로병사의 기본 구조가 달라진 건 아니다. 성품이나 기질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수명 문제는 간단히 넘기고 말 사안이 아니다.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수명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는 호흡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평생의 호흡 수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수명이 달라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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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과 그의 형들


동양의 전설적인 명의 편작한테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두 형이 있었다. 형제 모두가 의술의 대가였는데, 큰형은 병이 걸리기 전, 곧 미병단계에서 치료를 했다고 한다. 환자가 되기 전에 손을 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자가 없으니 의사도 없는 경지라고나 할까. 작은형은 그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초기단계의 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소소한’ 병을 고치는 아마추어 의사라고 생각했다. 병이 작으면 의술이 권위를 행사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막내인 편작은 병이 극심하게 진행된 상태의 환자들을 주로 고쳤다. 그래서 불치병을 고치는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는 것. 병의 스케일에 따라 의원의 명망도 높아진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편작의 집안에선 편작을 제일 하수로 취급했다고 한다.(쑨리취 외. 『천고의 명의들』, 류방승 옮김. 옥당, 2009, 26쪽)


이 일화를 잘 유추해 보면 우리시대 임상의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우리시대 의료기술은 불치병, 난치병을 고치는 데 주력한다.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어찌 보면 일상을 내팽개침으로써 병을 있는 대로 키우고는 그 다음에 첨단장비에 의지해 병을 고치는 ‘버라이어티쇼’를 벌이는 느낌이다. 이게 정말 최선인가? 편작의 형들이 주목한 미병단계, 병의 초기단계는 다름아닌 일상이다. 이 단계에서 고친다는 건 대단한 의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 안에 병과 치유의 키가 다 들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학도 가정의학이나 예방의학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건 검진이다. 모든 질병에 대한 예방학적 충고가 정기적인 검진, 조기발견이다. 아마 각 장기별로 있을 수 있는 병에 대한 검진을 다 받으려면 매일같이 병원을 드나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병을 막는다 한들 그건 이미 삶이 아니다. 삶이 사라진 자리에 의술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반드시 환기해야 하는 것은 이 검진들의 신뢰도다. 실제로 “미국의사협회 홈피에 보면 CT나 MRI의 유효율이 4% 정도밖에 안 된다.”(최종덕, 『인문의학』 1집, 145쪽) 또 얼마 전 통계에 따르면 유방암 확진율이 0.68%라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 말하자면 안 해도 되는 검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검진을 받도록 강요(직·간접으로)받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이터인 셈이다.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해서 엄청나게 비싼 검진비를 챙기고 있는 것이다. 정말 국민건강을 위한 예방조치라면 마땅히 무료거나 무료에 가까워야 한다. 이런 시스템하에서는 늘어나는 게 의료사업 종사자다. 미국에서도 인구의 10%를 상회한다고 한다. 이들의 물적 토대가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질병과 질병에 대한 공포가 생산될 수밖에 없다. 난치병, 불치병이 많을수록 병원의 권위는 커진다. 편작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일찍이 이반 일리히가 예견한 바대로, “병원이 병을 만드는”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럼 이런 의료적 시스템을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바로 편작의 형들이 행한 의술이 널리 퍼져야 한다. 미병단계와 초기단계에 개입할 수 있는 의사, 의사와 환자의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의 ‘의료적 공간’이 활짝 열려야 한다. 주치의와 평의가 그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 될 것이다. 주치의란 일정 지역의 주민을 담당하는 의사로거, 이들은 그야말로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래야 개입이 가능하다. 미리 예방하고 조언하고 습관을 바꾸게 하고 등등. 이런 ‘의사 같지 않은’ 의사들이 곧 평의에 해당한다. 병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음식과 운동, 칠정과 관계, 이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일단 몸이 아프면 누구나 이 과정에 대한 점검을 시작해야 한다. 식습관을 바꾸고, 적절한 운동을 시작하고, 감정의 회로를 관찰하고 노동의 질과 양을 조절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어떤 치유책도 별 의미가 없다. 수술과 약, 특효법은 그 다음에 투여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의사가 바로 평의다. 의사라기보다는 교사 혹은 멘토에 더 가깝다. 그렇다. 의사는 모름지기 의술을 베푸는 일보다 몸과 질병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 주는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병원이나 약국엔 반드시 공부방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의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에서 최근 의료계 동향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강의나 세미나가 열려야 한다. 의사가 선생님이 되고 병원이 동네 공부방에 되는 배치.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의료환경이라 할 수 있다. 수술과 약이 적극 개입해야 하는 난치병들의 경우는 당연히 국가와 공동체에서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 질병과 치유과정 자체가 공동체의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쿠바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이상적인 게 아니라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이런 식의 의료적 환경을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이 현실화되는 건 시간문제다. 물론 『동의보감』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동의보감』을 통해 생명과 우주에 담긴 비전 탐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식의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한 까닭도 의학적 앎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한 데 있다. 즉, 특수한 계급과 전문가들에 한정되었던 앎의 독점을 해체하고자 한 것이다. 바야흐로 대중지성의 시대다. 『동의보감』은 의역학이야말로 대중지성의 요체임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준다.


‘호모 큐라스’, 자기 몸의 연구자

큐라스는 케어의 라틴어다. 고로, 호모 큐라스란 케어의 달인이라는 뜻. 케어는 치유, 돌봄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수련이 더 적절하다. 치유와 배려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용어들이 지닌 한계상황 때문이다. 현대의학에서 치유는 정상인이 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상성이란 생리의 표준적 수치를 의미할 뿐 아니라, 엄마-아빠-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삼각형 안에 무난히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재영토화의 길!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어느 누구도 인생의 주인이 되기는 어렵다. 누구든 그 삼각형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껏 큰병을 앓고 나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이보다 더 허무한 일도 없을 터. 그래서 여기서 케어는 치유와 배려를 넘어선 자기수련이라는 의미로 변환될 필요가 있다. 원래의 정상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라는 전 과정을 자신의 힘으로 넘어서겠다는 발심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실천을 통해 그것을 닦아 가는 과정이 곧 수련이다. 의술이 양생술로 도약하는 지점 또한 거기다.

태어난 이상 누구든 아프다. 아프니까 태어난다.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아픔이다. 또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얼굴이다. 생명의 절정이자 질병의 최고경지이기도 하다. 결국 탄생과 성장과 질병과 죽음, 산다는 건 이 코스를 밟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질병과 죽음을 외면하고 나면 삶은 너무 왜소해진다. 아니, 그걸 빼고 삶이라고 할 게 별반 없다. 역설적으로 병과 죽음을 끌어안아야 삶이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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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은 거의 대부분 의약을 배우고 익혔다.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거기서 중요한 건 의학의 지식이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학과 역학은 보편지다. 거기에서는 국경이나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도 무의미하다. 생로병사라는 보편적 코스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시대는 정확히 반대다.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의료가 발전했고, 그것은 거의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동네 약방에 있는 약들은 아주 싼값으로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은 누구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 오지 국가 공인 전문가의 몫일 뿐이다. 하긴 서양의학은 배우려고 해도 배울 길이 없다. 그래서 전문가건 대중이건 기술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한의학을 포함하여 동양의학들이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점에 있다. 그게 가능한 건 담론의 배치 자체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다는 점,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 특히 인생과 우주에 대한 가르침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등 때문이다. 그야말로 보편지인 셈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것들, 누구나 닦아 가야 할 지혜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 지식에 접속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치유본능을 일깨우게 된다. 인간에게는 생득적으로 타고난 원초적 본능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치유본능만큼 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누군가가 아플 때 그 아픔을 덜어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마음의 병가지 고칠 수 있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의술이나 주술사, 곧 의역의 앎이란 이토록 매혹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런데 이걸 완전 침묵시켜 버리는 것이 근대적 지식의 배치다. 근대 지식에선 의료적 재능이나 욕망은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다. 의과대학 지망생들이나 의사들이 어쩌면 이런 본능에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따라서 의학의 새로운 배치에서 중요한 건 이 치유본능을 활짝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트로’에서 제기했듯이, 『동의보감』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러나 『동의보감』을 사상사나 담론사에서 다루는 경우도 거의 없다. 고전문학, 한문학 연구자들이 『동의보감』을 텍스트로 삼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전통문화를 가장 많이 지키고 있는 사찰에서도 의학만은 거의 전적으로 임상의학에 기댄다. 그런가 하면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명당이라는 곳은 한국 최고의 재벌이나 정치가들이 독점하고 있다. 보통사람들이겐 실용지와 기술지만 던져 주고 고전의 지혜와 비전은 부르주아들이 점령해 버리는 이 기이한 독점현상! 한편 우리시대 최고의 의료는 한방-양방 협진이다. 최고의 기술진과 기계들을 통해 최고의 의료를 펼치겠다는 야심, 이것을 누릴 수 있는 건 어마어마한 부자들뿐이다. 지식과 부의 독점이 낳은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리라.

또한 위험한 편견은 동양의학은 산중에서 도를 터득한 이후에야 세상에 펼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뭔가 특별하고 고원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의역의 핵심은 자연이다.


제인한방병원 병원장 김길우(02, 3408~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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