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승닮아 남주자!/정언수 선생님

나만 아는, 노자 도덕경; 11장(21.03.07).

by 김길우(혁) 2021. 1. 21.

도덕경 11장.

도덕경은 내용이 간결하고 명쾌한 글이다. 그런데 해석자들이 엉터리로 사족을 붙이면서, 노자의 사상을 망쳐 버렸다. 그 이유는 1장에서 유(有)와 무(無)라는 글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십복공일곡(三十輻共一轂) 당기무유거지용(當其無有車之用), 
30개 바퀴살과 하나의 바퀴통이 함께하고, 그 좌우(左右)는 수레의 쓰임에 실제가 된다.

당(當)= 당할, 담당하다, ~이 되다.

◆최씨=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 무(無)는 섭리라고 했고, 섭리는 천지(天地), 좌우(左右), 음양과 같은 상대성으로 사물의 실제를 밝히는 이론이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바퀴의 용도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바퀴가 크면 바퀴살이 굵고 많을 것이고, 바퀴가 작으면 바퀴살이 가늘고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상공은 옛날에 수레바퀴살을 30개로 한 것은, 한 달의 숫자를 본뜬 것이라고 헛소리를 했다. 이렇게 머릿속에 수레바퀴의 크기나 바퀴살이 몇 개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노자의 사상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노자가 말하는 30개 바퀴살은 짝수를 말하는 것뿐이다. 즉 바퀴살이 30개면 15개는 좌측, 15개는 우측으로 엇갈려 있어야 바퀴가 뒤틀리지 않기 때문에 모든 바퀴살은 홀수가 아니고 짝수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이다. 또 수레에는 축을 끼우는 구멍이 있어야 바퀴역할을 할 수 있다고 떠들고 있는데, 손수레의 바퀴는 구멍이 없으니 확인해봐라.

연식이위기(埏埴以爲器) 당기무유기지용(當其無有器之用),
진흙을 빚어야 그릇으로 여기고, 그 요철(凹凸)은 그릇의 쓰임에 실제가 된다.

◆최씨=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된다.

◉ 텅 빈 공간은 허(虛)이지 무(無)가 아니다. 만약 무(無)가 텅 빈 것이라면 파이프라고 하지 그릇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릇은 요철(凹凸)로 들어가고 나오는데 따라 모양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릇이 어떠한 모양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

★우리가 외국어를 우리글로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충실하게 대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나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취할 태도가 아니다. 글자대로만 읽어도 노자의 사상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지를 알 수 있는데, 왜 굳이 사족을 붙이거나 삭제하면서 문장을 꾸미겠는가? 원문에다가 사족을 붙이고 문장을 꾸미기 전에 노자가 무(無)와 유(有)란 글자를 왜 사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다. 왜냐하면, 도덕경이 잘못된 것은 중국의 하상공이나 왕필이 ‘주’를 달면서 무(無)와 유(有)란 글자를 몰랐기 때문이고, 또 잘못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어떤 사실도 확인하지 않는 믿음 때문이었다.

착호상이위실(鑿戶爽以爲室) 당기무유실지용(當其無有室之用),
문을 시원하게 뚫어야 방으로 여기고, 그 출입(出入)은 방의 쓰임에 실제가 된다.

◆최씨=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 사람의 폐는 호흡하고 심장의 피는 출입(出入)하는 것처럼, 방도 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노자가 말하는 無有(이론과 실제)는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지로, 늘 함께 가야 하는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는 이렇게 바퀴, 그릇, 방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읽은 ‘슈왈츠쉴드’가 2달 만에 블랙홀이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낸 것처럼, 만약 오래전 중국에 하상공이나 왕필로부터 제대로 해석이 되었다면 동양의 문화가 서양보다 천년은 앞섰을 것이다. 중국역사에 제가백가(諸家百家)가 있는데, 크게 9 유파(流派)로 나누고, 이중에 성현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현들 중에 도덕경을 읽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만약 도덕경을 읽었다면 자신들 나라의 국어도 모르는 꼴이 되고, 또 도덕경을 읽고도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웠다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꼴이 돼버린 것이다. 이 사람들 덕분에 동양의 지성(知性)은 아집(我執)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어떤 것이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가 2장에서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음성(音聲), 전후(前後)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섭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만,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물리학에서도 간단한 법칙일수록 모든 대상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고유지이위리(故有之以爲利)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 
그러므로 실제는 이로움으로 여기고, 섭리는 쓰임으로 여긴다.

◆최씨=그러므로 유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는 기능을 하게 한다.

◉수레, 그릇, 방은 우리 생활에 이로움을 제공해주는 실제이지만, 섭리의 상대성이 있어야 이용하기 편리하다. 그래서 실제를 수단(手段)으로 삼으면, 섭리는 방법이 되는 것이니, 한마디로 말하면 실제의 가치는 이론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 또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쓸모 때문이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많은데, 없음의 쓸모라는 것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문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연구해도 관계나 작용, 또 정체 등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종교, 역사, 철학, 의술 등 전문가의 학설이 굳어지면,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낡은 관습이 만연하다. 이와 같이, 케케묵은 관습이 한국에 만연하게 된 이유는 일반적인 기초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11장 전문.

30개 바퀴살과 하나의 바퀴통은 함께하고, 그 좌우(左右)는 수레의 쓰임에 실제가 된다.

진흙을 빚어야 그릇으로 여기고, 그 요철(凹凸)은 그릇의 쓰임에 실제가 된다.

문을 시원하게 뚫어야 방으로 여기고, 그 출입(出入)은 방의 쓰임에 실제가 된다.

그러므로 실제는 이로움으로 여기고, 섭리는 쓰임으로 여긴다.

 

★ 도덕경은 희한하거나 신비한 것이 아니고 자연의 법칙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글자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도(道)에 대해서 횡설수설하는 이유도 유교의 관습 속에서 노자의 자연섭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노자의 도덕경이 주역의 계사전보다 먼저 공개되었다면, 공자는 노자의 도를 보고도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만약 공자의 계사전이 노자의 도덕경보다 먼저 공개되었다면, 잘못된 공자의 도를 노자가 바로 잡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추구해야할 도(道:길)는 형이상(形而上)이 아니고, 형이하(形而下)가 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도 ‘간단한 법칙일수록 모든 대상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야하는 이유는, 선택을 잘하면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있고, 선택을 잘못하면 몸 주고 빰 맞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사기(史記)에는, 진시황이 쌓기 시작한 만리장성의 목적이 진나라가 오랑캐에 의해 망한다는 점괘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진나라가 망한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내부의 호해(내시)였다. 그래서 정치는 외부 협치보다 내부 갈등이 중요하고, 사람도 외부의 세균(바이러스)보다 내부의 면역력이 중요하다. 즉 리더의 말보다 자신의 생각(상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의 가치는 이론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