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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닮아 남주자!/정언수 선생님

나만 아는 노자 도덕경; 들어가며(20.12.20).

by 김길우(혁) 2021. 1. 10.

도덕경은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인간의 본원적인 주제를 심도 있게 파헤친 동양 최고의 경전이다.  그런데, 똑같은 도덕경인데도 해석자들마다 서로 다른 개념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전부 엉터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도덕경을 읽을 때는 ① '언어는 약속이다.'라는 것과 '글자(문법) 그대로 보자.'는 것을 명심하고 읽어야 한다.

☯ 특히 이 1장은 도덕경 전체를 설명하는 뿌리이자, 도덕경 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기 때문에, 이 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② '글을 배울 때는 먼저 명사(名詞)를 배운 다음에, 그 동사(動詞)까지 배워야 전체를 알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자신의 소중한 인생(세월)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다.

언어는 약속이다!

 도(道)란, '길, 도리, 근원, 기능, 이치, 방법'이다. 이것을 벗어나지 말자.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 도(道)를 도라 할 수 있으나, 항상 도(道)가 아니다,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명(名)은 도(道)의 이름이다.

☉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으나, 항상 이름이 아니다.

가(可)=~할 수 있다. ~할 만하다. 비상(非常)=심상치 않다. 예사롭지 않다. 상도(常道)=항상 지켜야 할 도리.

사람들은 '노자의 도(道) 신비하고 형이상적인 것이므로 복잡해서 말로 전할 수 없다?' 고 하는데, 그중에 한국 양대 산맥의 해석을 보자.

 

◆김씨=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문장을 약간 꾸몄다.

 

◆최씨='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글이나 말로 도(道)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도(道)를 모른다는 것이다.

 또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름을 개념(사물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화할 수 없다면, 오히려 그 자체가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또 可道나 可名의 해석은 유교식 해석이다. 非常道나 非常名에서도, 형용사나 부사(常)의 수식어 구보다 수식을 받는 ‘道나 名’이 중요하기 때문에 ‘常’ 자는 ‘항상’으로 해석해야 간단하다.

 물리학에서도 ‘간단한 법칙일수록 모든 대상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했고, 내가 '풍수가 사기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노자의 간단명료한 글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석자들은 글자는 엉뚱하게 보고, 해석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글자는 있는 그대로만 보고, 그다음에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설명해야 한다.

 

▶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도(道), 이름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물의 용량을 말할 때 ‘이만큼’으로 말하기보다 '컵, 바가지, 양동이' 등으로 그릇의 이름을 붙여서 개념화하면,  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어서 알기 쉽다. 그런데 이 물의 양을 ‘CC’나 ‘리터’처럼 정확한 이치(道)로 측정하기 위해서는, 용량에 따라서 ’홉, 되, 말’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홉, 되, 말은 어떤 것으로든 용량을 측정할 수는 있지만, 10홉은 1되, 10되는 1말이라는 1☓10의 규칙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량의 물을 측정할 때는 ‘말’이 적합하고, 소량의 물을 측정할 때는 ‘홉’이 적합하다. 그래서 대량의 물을 측정한다면 ‘말’이 상도(上道)가 되고, ‘홉’이 하도(下道)가 된다. 반대로 소량의 물을 측정한다면 ‘홉’이 상도(上道)가 되고, ‘말’이 하도(下道)가 된다. 그러니까 홉, 되, 말 중에서 어떤 것이 용량의 道(이치 방법)에 적합한지를 먼저 알아야만,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고 한 것이다.

◉ 그런데 파악하려는 대상이 용량(물)이 아니고 ‘무게’를 단다면 ‘저울’을 사용해야 하고, ‘길이’를 잰다면 ‘’를 사용해야 가능하다. 즉 용량을 재는 ‘도구’ 무게(이것)도 깨닫고, 길이(저것)도 깨달으면 좋겠지만, 어떤 도(道:이치 방법) 하나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을 측정할 때는, 이름이 바뀔 수밖에 없으므로 '명가명(名可名), 비 상명(非常名)'이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노자의 도(道)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추상적인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확하게 파악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도(道), 즉 그 이름을, 개념화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모든 사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즉 도(道)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먼저 명사를 알아야 한다!

▶ 왜냐하면 동양사상이 견강부회하게 된 것도 정명(正名:진짜 이름, 바른 이름)을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
무(無)는 天地之始의 이름이고, 유(有)는 萬物之母의 이름이다.

◆김씨=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無有=명사(名詞)인데 동사(動詞)로 설명했다. 또 모든 것은 원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은 붙이면 된다. 대통령도 이름에 따라 일정한 기준으로 구분된다.

 

◆최씨=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이름 명(名) 자이지, 가리킬지(指) 자가 아니다. 가르치는 바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만든다.

無=사람의 몸에도 공간이 있어 활동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체적인 모습은 없지만, 이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역으로 빈 공간(空) 같은 것이다?

처음 始=시작이나 출발의 인식이다? 有=만물을 통칭하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 母='젖먹이는 모습, 동양사상에서, 어미는 낳는 것이 아니고, 기르는 것이다)?)'라고 헛소리를 한다.

★ 父生母育의 뜻을 모르면, 7장의 天長地久의 뜻도 모른다.

★ 이 사람들이 글자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동사’를 ‘명사’로 바꾸어도 天地之始가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天地之始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해석한 것은 모두 엉터리가 된다. 그러니까 2.000년이 넘도록 중국 사람들도, 이 天地의 처음(始)을 몰라서 꼴값을 한 것이다.

 

 

 

 

 

兌 7

乾 6

巽 4

 

離 9

 

坎 1

西

 

震 3

坤 2

艮 8

 

 

 

 

 

복희 선천팔괘도

 '天地의 처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가 도덕경을 기술하기 전(前)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노자가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주 중요하다. 노자가 본 것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우리도 볼 수 있는 것은, 복희의 선천팔괘(八卦)와 하도(河圖)가 있고, 문왕(文王)의 낙서(洛書)가 있으며, 주나라 때 만들어진 주역(周易)이 있다. 그래서 주역의 뿌리도 여기에 닿아있고, 도덕경뿐 아니라 동양학문의 모든 것은 복희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역경(易經)에서도, '천지(天地)가 분화(分化)될 때 가볍고 맑은 기운은 천(天)이 되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지(地)가 되니, 이를 천지정위(天地定位), 상양하음(上陽下陰)이라 했다. 

 

그러니까 중국의 시조(始祖)인 복희(伏羲)가 만든 선천과 하도에서, 역사와 문화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으니, 동양은 문화(文化)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서양은 신(神:여호아)의 천지창조에서 시작되었고, 그 사실을 본 사람이 없으니 신화(神話:황당무계)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천과 하도에서 음양, 괘(卦), 수(數), 방위, 경위(經緯), 24절기 등 여기에서 우주만물이 변화하는 시간성과 공간성 상호작용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60 갑자가☓78번가 반복되어서, 4680년이 흘렀고, 甲子→庚子= 37년을 더하니 정확히 4717년이 되었다. 180년. 그래서 동양의 역사, 문화, 철학뿐만 아니라, 도덕경에서도 선천팔괘의 기초를 모르면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학문이나 역사는 기초를 알아야 하는데, 해석자들은 갑골문이나 점(占)을 친, 하(夏)나라 은(殷)나라 이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근거와 기준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나 학문의 방식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선천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처음으로 선천팔괘의 이치를 밝혔으니, 중국에서 도덕경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중국에서는 대규모 학술회가 매년 열린다고 자랑하지만, 천명이 모이면 뭐하고 만 명이 모이면 뭐하겠는가? 자국의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모여봐야 오합지졸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 다음 ‘萬物之母’에서 ‘母’는 ‘어머니’지만 ‘근원이나 밑바탕’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萬物之母는 무엇인가? 이다./

노자는 여기에서 ‘天地의 처음’과 ‘萬物의 근원’을 설명하려는데, 죽간(竹簡)에 4글자를 계속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 간편하게 天地之始는 무(無)라 이름 붙였고, 萬物之母는 유(有)라 이름을 붙였으니까 /앞으로 무(無)는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유(有)는 실제로 받아들여, 그 이론과 실제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라는 것이다./왜냐? 선천팔괘는 이론이고, 만물은 실제이기 때문이다./ 한문에서는 有無 동사(작용)로 ‘있다, 없다’가 맞지만, 도덕경에서는 이론과 실제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고상무욕이관기묘(故常無慾以觀其妙), 상유욕이관기요(常有慾以觀其徼).
그러므로 항상 무(無:이론)를 가지고 그 묘(妙:묘함)를 보아야 하고, 항상 유(有:실제)를 가지고 그 요(徼:구함)를 보아야 한다,

욕심 욕(慾)=동사. 欲以=~을 가지고~해야 한다. 無=명사. 볼 관(觀), 묘(妙:묘할)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요(徼:구할)는 실제의 모습이다.

◆김씨=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개사)를 잘못 보는 바람에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無慾=마음을 비우면 오묘함을 본다?  有慾=하고자 하면 껍데기밖에 볼 수 없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하지 마라? 분별심은 진실을 못 보게 한다? 등 헛소리들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최씨=그러므로 항상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항상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볼 관(觀) 자이지, 나타날 현(顯) 자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無, 有(이론과 실제)인데, 無, 有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단순히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 구절에 지나친 의미(사족)를 붙여서 글을 왜곡했다.

반복하지만, 한문에서 '無=없다. 有=있다'가 맞지만, 도덕경에서는 이론과 실제이다.

 

☉ 노자가 무(無:이론)와 유(有:실제)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홉’이나 ‘되’나 ‘말’은 유(有:실제)이고, 1☓10의 용량은 무(無:이론)이니 有無의 관계로 상호작용을 보라는 것이다. 이때 만약 실제(그릇)와 이론(용량)이 1☓9나 1☓11로 맞지 않는다면, ‘그릇(컵, 바가지, 양동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도(道)의 이름을 홉, 되,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노자의 도(道)는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한 그 경계가 아니라, 바로 사물의 근본을 파악하고자 하는 어떤 이치나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도(道)는 이치나 방법이고, 이름(명사)은 무(無)와 유(有)라고 하였으니, 그 이론과 실제의 상호작용으로 사물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즉 이론의 가치는 실제가 결정하고, 실제의 가치는 이론이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주관(초월)적인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가 신(神)을 통해서 예수를 낳았다거나, 100일 기도를 하면 자식이 생긴다는 사기를 치지 않는다. 노자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남녀가 상호작용해야만 자식이 생긴다는 객관적 사실만을 말한다.

차양자동(此兩者同), 출이이명(出而異名), 
이 둘(이론과 실제)은 한 가지로, 나타내도 이름이 다르다.

이렇게 한문사전에서 찾아 글자대로만 읽어도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노자의 글(생각)은 무시하고, 자신의 관념으로 사족을 붙여서 해석하는 것을 ‘꼴값한다’‘꼴값한다’고 한다.

★다음 글들도 사전에서 찾아보면,

동위지현(同謂之玄), 함께 이르는 것을 심오하다고 하고, 
현지우현(玄之又玄), 
오묘(奧妙)하고 또 오묘하니. 
중묘지문(衆妙之門), 많고도 훌륭한 도리(道理)의 문이다.

★지금까지 한 글자도 삭제하지 않았고, 사족을 붙이거나 꾸미지도 않았으며, 문법도 바꾸지 않고, 순서에 따라 글자 그대로 해석하였다.

왜냐고? 글이라는 것은, 읽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잘못된 글은 독자들을 평생 고생시킬 수 있다. 그래서 글을 해석할 때는 글자대로 해야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1장을 통해서 지금까지 도덕경 해석자들의 지식이나 관념이 얼마나 구태의연한지 알게 되었고, 동양문화가 왜, 서양에 비해 열등한 문화가 되었는가도 알 수 있다. 지금도 동양인은 서양으로 배우러 가고, 서양인은 동양에 착취하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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